"알고 누리고 나누는, 주님의 소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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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21>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18-20은 교회의 존재목적이 제자를 삼는데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세 방식을 제시합니다. 먼저, 가면서 제자를 삼고 (VIP를 향한 섬김의 발걸음) 둘째로,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제자를 삼으며 (예배와 삶공부), 그리고 세례를 주면서 제자를 삼으라 합니다. 세례는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구원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베드로전서의 본문은 우리에게 당시에 있었던 세례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면서 세례에 대한 좀 다른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말씀은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더러움은 곧 몸의 욕망을 말합니다. 식욕, 성욕, 권력욕, 물질욕, 명예욕,... 당시에도 이 욕망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부도덕한 일들을 자행하곤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회는 세례를 받은 후 금욕적인 신앙을 가짐으로 이런 욕망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세례를 통해서 육체적인 욕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순식간에 삶이 변화되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과 동시에 우리의 영은 천국을 보장받는 곳까지 나아가지만, 우리 삶에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 길은 과정이고 투쟁이고 역사적 사건입니다. 마치 붓글씨 실력이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듯 우리 삶에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그네”(1:1,17; 2:11) 라고 표현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베드로는 세례란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양심이란 ‘착한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양심은 헬라어로 ‘쉬네이데시스’ 라고 쓰는데 이 단어는 “함께 안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혼자 알 뿐 아니라 함께 아는 것이 양심입니다. 베드로는 오늘의 말씀에서 ‘선한 양심’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양심이 다 옳고 선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은 양심을 따라 행동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고, 타인과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 사이를 오가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의 양심도 그렇게 믿을만한 게 못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심이 변하는 것도 쉬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심은 교육받고 계몽되어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과 구원행위를 향해서 영혼의 문을 끊임없이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선한 양심을 가지게 되는 유일한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께 선한 양심으로 응답하게 되면 결국 선한 양심을 당장 소유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은 ‘함께 아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가질 수 없는 선한 양심을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그 분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세례는 그 자체로 사람을 완성시키는 통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 분께 다가가려는 첫 걸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었기에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주면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삶이 완성되어서 받는 것도 아니고, 내 삶의 욕망이 모두 해결되어서 그 증거로 받는 것이 세례가 아니라면, 저는 우리 공동체 모두가 내 삶 속에서 선한 양심의 근원이 되어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세례의 길로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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