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의 첫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딸을 잘 키우셨습니까?"였다. 양봉진, 백영란 집사(안산 명성교회) 부부는 딸을 잘 키운 탓에 세월호 사고 때 딸을 천국으로 보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2반 반장이었던 고 양온유 자매는 세월호 갑판까지 나왔다가 친구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친구들을 구하러 객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온유의 부모님은 구조된 친구들로부터 온유가 객실로 다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온유 태명이 '부활'이었어요. 4월 16일에 세월호 사고가 있었고 3일 뒤 온유가 서른 한 번째 희생자로 발견되었는데 그 날이 4월 19일 부활절이었어요. 온유 태몽도 바다였고요. 돌아보건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온유 아버지 양봉진 집사가 말을 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진도에 내려가면서 저희 아이 이름이 생존자 명단에 없을 거라는 걸 직감했어요. 친구들을 두고 혼자 나올 아이가 아니었어요. 온유는 항상 그랬으니까요."
온유는 밝고 총명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교내에서 아이큐가 제일 높았다. 4학년 때 컴퓨터와 관련된 자격증을 독학으로 땄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잠깐 다녔던 피아노 학원은 집안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독학하다시피 하여 음악 심리상담사를 꿈꿀 정도의 피아노 실력을 갖췄다. 하나님께서는 온유에게 충만한 지혜를 부어주셨다.
교만할 법도 한데 아이는 겸손과 사랑이 넘쳤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년 대표를 했고 2학년 때는 반장이 된 후 학년 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친한 친구가 나간다는 소식에 출마를 양보했다. 토요일에는 고등부 예배, 찬양팀 연습 등으로 교회에서 예배를 준비했고 주일에는 모두가 기피하는 주일 1부 예배의 반주를 맡았다. 4남매의 맏이로서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온유의 친구들은 온유를 비타민과 같다고 말했다.
온유가 희생자로 발견되고 양 집사 부부는 장례 절차를 준비했다. "단원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장례식장도 깨끗하고 3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었어요. 우리가 빨리 장례를 치르고 비워줘야 다른 아이들의 장례도 치를 수 있으니까 이틀 동안만 장례를 치렀고요. 따로 부고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동안 천오백 명이 빈소를 찾아주셨습니다." 이 곳을 찾아왔던 분들 중 몇 분은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양 집사 부부의 평안하고 담대한 모습에 놀라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교회를 찾았다고 한다. 온유는 천국으로 떠나는 길에도 그렇게 복음을 전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엄마는 팽목항에 내려갔다. 구조 작업은 더뎠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도밖에 없었다. "뜨겁게 기도할 처소를 찾아 진도체육관을 몇 바퀴 돌았는데 기도할 만한 처소가 없었어요. 저뿐 아니라 현장에서 아이를 기다리던 믿지 않는 부모들에게도 뜨겁게 기도해 줄 기도의 삼겹줄이 간절했었거든요.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한국 기독교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슬픔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위로를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온유의 부모는 앞으로 이런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슬픔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중보하겠노라 말했다. 인터뷰 내내 부모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담대하고 따뜻했다. 그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