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비유에는 적어도 세 사람의 중심인물이 등장합니다.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비유의 제목도 결정됩니다. 먼저 둘째 아들은 탕자입니다. 남김없이 다 써버리는 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 아들에게 유산을 내준 아버지도 탕부입니다. 진정 헤픈 사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버린 둘째 아들을 매일 동구 밖에서 기다리다가,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 그의 회개는 듣는둥 마는둥 하고는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무모하게 씀씀이가 헤픈 아버지입니다.
여기에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평소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왔던 그는, 동생 때문에 일어나는 이 잔치에 참여하지를 못합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납니다.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큰 아들을 향해서도 아버지는 꾸짖지 않습니다. 설득하고 권면합니다. 자기의 사랑을 남김없이 다 써버리는 아버지가 맞습니다. 탕부가 맞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인물에 가장 공감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청중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큰아들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작은아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아낌없이 베푸시는 아버지를 보며 분노했겠지요. 하지만 주님이 말씀은 “두 아들 모두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은혜가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김없이 다 써버리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로 ‘은혜’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풍성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자신의 자격을 의식하고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은혜는 사라집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표현하는 단어는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가 ‘칭의’라는 단어입니다. 실패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해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은 불이 붙었습니다. 애간장을 저미는 심정으로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맏아들의 모습도 이해는 되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 맏아들을 향해서도 긍휼이 불타오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이들을 사랑하셔서 향기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헤픕니다. 그렇지만 값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용서를 위해서 당신의 유일한 아들인 예수님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선물을 긍휼과 사랑으로 헤프게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 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1) 자랑이 아니라 겸손으로 구원이 자격이 아니라 은혜임을 인정하십시다. 2) 둘째 아들들이 돌아올 수 있는 교회가 됩시다. 지금도 VIP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함께 그 분들을 인내하고 섬겨서 돌아온 둘째 아들들로 가득한 교회를 만들어 보십시다.